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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으로 풀어 보는 게임 디자인>(2022), 에이콘출판사

2020년 2월에 첫 문장을 번역한 다음 책이 출간되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손이 아주 느리기도 하고, 일을 하면서 틈틈이 번역을 진행한다는 핑계로 다른 역자분들만큼 속도와 품질을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기준 중 하나가, ‘역자인 내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없다’여서 원 저자만큼 전문적인 역량을 가지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번역하는 문장과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아야 기본적인 번역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을 번역하면서도 <영원의 건축>이나 <Pattern Language> 등 원서에서 언급된 건축 관련 책을 구매해서 읽고, 언급된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가급적이면 충분히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소스를 찾아보며 이해했습니다. 게임 디자인이라는 전문 영역을 다루는 서적을 문외한인 제가 번역을 하다 보니, 충분한 번역을 위해 사전에 공부하고 이해해야 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들을 통해 저의 역량도 함께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충분히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책의 첫 문장인 “Most of us rarely think about how we think”를 보고, 이 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시간 물고기 테스트'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파악한다는 인지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부터 1장이 시작됩니다. 이어서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철학의 역사를 비롯해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는 시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전에 피상적으로만 알던 일화들을 좀 더 자세하게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학의 교양 수업을 듣는 것처럼, 무척 재미있게 번역을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어서 시스템에 대해 알아봅니다. 시스템은 부분과 부분이 루프를 형성하면서 더 높은 레벨의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물 분자의 구조, 즉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로만 구성된 물이 어떻게 다른 사물을 적시게 만들고 액체로서의 속성을 가지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혼돈 complicated복잡 complex(이 두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엄청 고민했던 기억이 나네요)에 대해 구별하고, 소스, 스톡, 싱크와 같은 게임 디자인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공명 현상으로 다리가 무너지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기도 했고, 실제로 발생했던 인도의 코브라 사냥, 그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돌아온 늑대가 가져온 효과 등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재로 등장합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아서 하나하나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게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봅니다. 사실 게임 QA로 15년을 일했지만, 정작 내가 다루는 게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고 공부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게임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룸으로써 완성된다는 이야기가 인상깊었습니다. 3장에는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에이전시 agency 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런 단어들도 평소에 많이 사용하지 않다 보니 번역과 의미 전달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전 권을 통틀어 가장 인상깊은 에피소드 중의 하나인 ‘<드워프 포트리스>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죽음’도 흥미로웠습니다. 게임 안에서 갑자기 고양이들이 죽어나가는데, 결론은 버그가 아니라 각 부분이 수행하도록 디자인된 행위들이 모여서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를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WoW의 ‘오염된 피 Corruputed Blood 사건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상호작용과 재미를 생리학적으로 풀어보는 장도 재미있습니다. 재미를 느낄 때 사람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플로우 상태는 어떤 것인지, 몰입과 정신적인 비용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뒤를 이어 게임 디자인의 핵심인 루프엔진에 대해 알아봅니다. 이어서 게임 내 밸런스를 잡는 부분도 등장합니다. 각 무기의 밸런스를 잡는 부분을 단계별로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게임 QA로서 검증의 대상이기는 했으나, 최종적인 기획서와 스펙 문서가 전달되기 전까지 어떤 과정이 수행되는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 부분을 통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값들이 도출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경험해보고 알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작업이 얼마나 수고로운 것인지 알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책의 뒷 부분은 게임 팀에 대한 설명, 그리고 게임 회사를 만들 경우 어떻게 게임을 피칭해 사용자와 투자자에게 어필할 것인지와 같은 부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게임 도메인에 입문하려는 디자이너와 개발자 분들, 그 외의 다양한 직군들이 미리 알고 있으면 좋을만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번역 작업도 하나의 프로젝트이므로 스프레드 시트로 작업 진행도를 체크하고, 각 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통일하도록 Terms 탭을 만들어 관리했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나 작업을 진행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작업이 남았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Terms 탭 역시 일관된 단어의 번역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사실 번역에 활용할 다양할 툴을 찾아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직 워드와 스프레드시트를 넘어설 만큼 고급 기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책을 출간하고 ‘조금 더 공부하고 고민했다면 더 충실한 번역을 제공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원서의 좋은 내용을 제대로 독자 분들에게 전달해 드리지 못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번역을 진행할 때는 시스템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반복되는 문구 때문에 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조금 더 넓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 준 고마운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임 디자이너를 포함해 이 책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조금이라도 재미있었던 책으로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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