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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콘출판사 故 권성준 사장님. 현대자동차 광고에 출연하셨을 때의 모습.
지난 수요일 사장님을 마지막으로 뵙고 왔습니다. 

화요일 아침 황망한 부고를 받고는 하루 종일 마음이 아팠습니다.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지면 늘 한 번 찾아가서 뵈어야지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도 접어야 하게 되었네요. 

 

출판사의 대표님과 역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관계보다 더 깊은 추억과 인연을 만들어 주신 점 너무 감사했습니다. 
 
에이콘출판사와 인연을 맺은 지 얼마 안된 초보 번역가 시절, 다른 역자 분들과 함께 사장님과 식사를 같이 하고 돌아갈 때 였습니다. 아마 사장님을 두 번째인가 뵈었을 때로 기억합니다. 아이 돌잔치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고, 하루하루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저의 마음을 닳고 메마르게 할 때였습니다. 자리가 파하고 다들 헤어질 무렵, 사장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봉투 하나를 품에 넣어 주셨습니다. 

“아들 돌잔치 얼마 안 남았다며? 나는 못갈 것 같으니까 일단 넣어둬.”
“아 사장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만난지 얼마 안된 초보 번역가의 집안일도 이렇게 챙겨주시는 분이구나, 멋지고 고마운 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장님의 말씀은 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내가 업계 선배로 너 챙겨주는 거야. 너도 나중에 그냥, 이유없이 니 후배들 잘 챙겨줘라. 그러라고 주는거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 한켠이 먹먹했습니다.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해준다는 것, 아니 오히려 내가 준 것을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라는 사장님의 말씀이 당시 저에게는 너무 멋져보였고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후배들을 대할 때마다 사장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그런 선배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장님처럼 멋지게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더 후배들과 동료들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사장님을 뵐 때마다 흐르는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멋진 말씀과 인사이트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인덕원에 사무실이 있을 때 신사동까지 태워주시면서 들려주신 다이아나 크롤은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조수석 시트에 편하게 몸을 묻고, 사장님이 선곡해 들려주시던 음악을 듣던 그날 밤의 드라이브는 지금까지 한 그 어떤 드라이브 보다 더 기억에 남습니다. 늘 힘들고 음악 듣고 싶으면 찾아오라는 사장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네요. 
 
역자와 저자들을 초대해 <레디플레이어원> 시사회를 마련해 주셨을 때, “넌 머리가 왜 이렇게 하얗게 됐냐?”라는 말씀에 “사장님처럼 되고 싶어서요!”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너털웃음 웃으시며 뒤돌아 가시던 모습이 제가 본 사장님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네요. 사장님을 뵐 때마다 ‘나도 저렇게 나이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항상 했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네요. 다만 잠시 그런 사장님의 모습이 희미해 질 때, 사장님을 찾아뵙고 그 멋진 너털웃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고 마음 아픕니다.
 
늘 제가 닮고 싶은 선배의 모습으로, 사장님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모쪼록, 이제는 편하게 쉬시길 바랍니다.